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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예순 셋에 대입검정고시 합격한 송종순할머니px,aut

작성자
이**
작성일
2000-10-05
댓글
0
조회수
518
2000년 8월28일. 이날은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라우. 정말 ‘꿈같은 일’이 벌어졌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정부가 공식 인정해주는 ‘대입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으니까. 게다가 ‘최고령 합격자’라는 부끄러운 수식어까지 달았으니….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말 아버지의 고향 경남 삼천포에서 부산으로 피난하는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지 딱 50년 만의 일이라우. 지난 2년 가까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손에 쥐어진 것이 달랑 합격증명서 한장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더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밀려오는 감격은 잠시 잠깐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탈함에 안절부절못했다우.


5년 전 폐암으로 남편을 먼저 보낸 이후 큰아들 집에 몸을 맡겨왔다우. 이미 출가한, 친구같은 네 딸들도 있지만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우. 그토록 좋아하던 운동도 해보고 아파트 벤치에 나가 또래 할머니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눠보았지만 허전함은 메워지지 않았지. 그러다 98년 9월5일 토요일. 이날 역시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라우. 아침 TV뉴스에 72살 할머니가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지, 암.


20살 먹던 해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에게 시집 와서 1남4녀를 키우는 동안 한번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공부’.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그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우. 넉넉지 못한 생활에 쫓기듯 살아오면서도 늘 ‘공부’가 작은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는데. ‘그래 이제라도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해보자’며 곧바로 청소년회관에서 운영하는 무료 야학의 문을 두드렸지. 오후 7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거의 1년 동안 쉬지 않고 중등과정을 마쳐 지난해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우.


‘야학’이라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구먼. 193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공부하고 아버지를 따라 귀국했지.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곧바로 다시 일본으로 밀항했지만 소식이 끊겨버렸다우. 홀로 된 어머니와 고향 삼천포에 남은 우리 3남5녀 누구도 공부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지. 광주리에 말린 생선 등을 이고 어머니가 행상나가면 나는 그 길로 엄마 몰래 초등학교로 달려가 공부를 했다우. 지독하게 가난한데도 왜 그리 공부는 하고 싶었던지. 6학년때 터진 6·25 때문에 부산 영도로 피난을 왔지.


그나마 남들은 돈이 있어 땅을 빌려 천막을 치고 살았으나 우리 가족은 네 기둥 사이를 가마니로 막은 움막집에서 지냈지. 그런 와중에서도 공부 욕심은 전혀 꺾이지 않았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피난온 한 여자중학교가 영도에서 천막학교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 천막 뒤에 몰래 서서 귀동냥 공부를 하기도 했다우.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서면에다 대학생들이 야학을 열었다고 이야기해 줬지. 그날 우리는 서너시간 넘게 걸어 야학에 가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왔어. 그렇게 어머니 몰래 한달 정도 공부를 하다 마침내 들켜버렸지.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다시 한번 야학에 가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는 어머니 말씀으로 정식 공부는 끝이었다우. 그리고 제약회사 공원으로 한 2년 일하다 결혼을 했지.


돌아가신 남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젊은 나이의 결혼은 공부하고 싶은 나에게 또하나의 장애물이었다우. 결혼 전날 어머니는 “그렇게 공부 공부하더니 선생님과 결혼하니 시집가서 실컷 공부 가르쳐달라고 하면 되겠네”라고 말했다우. 하지만 나는 아이 낳고 살림할 걱정이 앞서 아예 체념하고 말았다우. 나의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지. 첫아들을 낳은 이후 줄줄이 딸을 넷 낳은 내 삶은 ‘공부’라는 단어를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우.


10여년 전 큰아들과 첫딸이 대학에 가고 나머지 딸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손가락에서 붓이 나오는 꿈을 한번 꾸었다우. 이때 못다한 공부에 대한 생각이 다시 솟구쳐올랐지. 부산시내를 다 뒤져 주부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학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우. 마침 나보다 젊은 주부 몇이 있어 쑥스럽지 않게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또 포기하고 말았지. 공부한답시고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게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 데…, 도무지 양심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우.


남편이 세상을 등진 후 외로워서, 가슴에 맺힌 게 많아서 공부를 시작했다우. 그 결과 2년도 안되는 기간에 대학 입학 자격을 얻었지만 이 나이에 대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한참 고민을 했다우. 친구들은 4년여가 넘는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꼭 대학까지 마쳐야겠느냐고 말리기도 했지. 그 시간과 돈으로 자기들과 여행이나 다니자고. 나도 갈팡질팡 중심이 잡히지 않았지. 그####굘?얼마전 가족회의에서 자식과 사위들이 대학 진학을 권유했어. 이왕 들여놓은 길, 50년 동안 후회하며 살았는데 또 후회하지 않도록 공부해 보라고…. 힘들면 중간에 그만두어도 된다면서.


60이 넘은 ‘할머니 대학생’이라,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야. 1년간 수능공부를 해서 2002년에는 꼭 봄꽃이 활짝 피어나는 캠퍼스를 밟아볼 생각이야. 이 나이에 깊은 학문을 할 생각은 없고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내 신세와 비슷한 노인네들과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우. 큰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취재수첩]아들·손자들 직장·학교간후 밥상펴고 쪼그리고 앉아 공부-


‘60대 대학생을 꿈꾸는’ 송종순 할머니(63)는 아직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 아픈 것 같단다.


“지금까지 가진 기술이 없어 닥치는 대로 일했다”는 것이 송할머니의 얘기. 시집 가자마자 목장갑 만드는 기계를 사서 목장갑을 짜기도 했고 조카가 국제시장에서 우산장사를 해서 천을 떠다가 우산을 만들기도 했다. 또 조금의 목돈이 생겨 서면에서 이불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솜가루가 몸에 안좋다는 자식들 말에 그만두었다. 부산대 앞에다 클래식 찻집을 열기도 했지만 ‘물장사’가 적성에 맞지 않아 금세 그만두고 말았다. 80년대 중반 남편 요양을 위해 부산 외곽 야산에서 작은 목장을 하기도 했으나 ‘한우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곧 문을 닫고 말았다.


1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하는 일은 한의원에서 쓰는 삼베자루 만드는 일. 처음에는 경희대 한의학과를 나와 한의사로 일하는 큰아들과 둘째사위를 위해 이불장사를 하다가 남은 미싱을 이용해 만들었다. 이런 삼베자루를 필요로 하는 한의원이 많을 것이라고 여겨 여러 한의원을 방문하며 거래를 텄다. 그중 부산에서 꽤 큰 한의원 한곳과 작은 한의원 10여곳에 아직도 납품하고 있다. “일할 때는 공부할 때와 다른 일하는 즐거움이 있다”며 웃는다.


송할머니의 공부방은 없다. 아들·손자들이 직장과 학교에 간 후 거실에 밥상을 펴고 쪼그리고 앉아 공부를 했다. 2년 가까이 그렇게 공부해서인지 왼쪽 무릎에 약간의 관절염 증세가 있어 요즘은 배드민턴 등 큰 무리가 오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우선 몸이 튼튼해야 공부도 할 것 아니냐”면서.


/부산/조현석기자 chs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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