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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성공회 나눔의 집 px,auto

작성자
살**
작성일
2001-01-12
댓글
0
조회수
503
종교는 때로 ‘화해와 평화의 전달자’로, 때로 ‘불안과 불화의 원인’으로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종교가 여전히 인간의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창시자의 위대한 정신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인류를 둘러싼 조건들이 격변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종교 본연의 모습을 되살리려는 각 종교의 치열한 움직임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1986년 가을, 당시로는 서울의 대표적 빈민 지역 중 하나인 상계4동 달동네를 두 명의 신학생이 찾았다. 김홍일·송경용, 성공회 소속인 20대의 두 사제 지망생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꿈을 안고 있었다. 몸 담은 교회와 지역사회 양쪽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의식화 작업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경계심 담은 눈총을 받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마을 주민들과 친해지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듬해 봄 이들은 ‘성공회 노원 나눔의 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청년 신자 몇 명의 도움을 받아 탁아, 검정고시 야학, 마을문고를 시작했다. 부부가 모두 일터로 나가야 하고 청소년들이 배움을 갈망하는 동네 실정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원 나눔의 집’은 여건의 변화에 따라 몇 차례 활동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90년대 들어 주변 지역이 재개발되자 주민들과 함께 소규모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생산공동체와 공부방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갔다. 이어 도움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소년소녀 가장과 무의탁 노인들을 지원하는 가정결연 사업을 시작했다. 또 97년 말 외환 위기가 닥쳐 실업자가 크게 늘자 이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는 ‘실업자 사업단’을 만들었다. 이처럼 필요에 따라 새 일을 시작한 결과 지금은 자활지원센터·고용지원센터·실업자사업단·푸드뱅크(food bank)· 청소년교실·재가복지사업 등 다방면의 조직을 운영하게 됐다. 이들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원봉사자를 포함하여 상근자가 80명이 넘고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

상계동에서의 순조로운 출발은 ‘나눔의 집’이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송경용 신부가 상계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91년 3월 ‘봉천동 나눔의 집’을 만들었고 ‘성북 나눔의 집’(88년 7월·이재복 신부), ‘인천 송림동 나눔의 집’(89년 6월·조흥식 신부), ‘수원 나눔의 집’(99년·임영인 부제)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또 대전 성남동, 부산 반송동, 천안, 원주 등에도 나눔의 집이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가정결연·청소년 지원·자활지원 등을 기본 활동으로 하면서 장애인 센터·어린이집·환경모임·마을신문· 어머니 교실 등 지역 여건에 맞는 일도 하고 있다.

성공회 나눔의 집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주로하지만 그렇다고 사회복지기관은 아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생활공동체’이다. 김홍일 신부는 “종교라면 흔히 예배 공동체를 떠올리지만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연결되어야 진정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며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종교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이런 정신은 초대 교회 공동체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나눔의 집이 대외활동과 함께 내부적으로 신앙 공동체의 위상, 영성과 활동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홍일 신부는 그 해법을 신앙 공동체와 활동 공동체의 보완적 관계에서 찾는다. “기회가 되면 수련과 교육에 전념하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도 만들고 싶다”는 김 신부는 “두 공동체를 연결하면 현대에 맞는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종교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선민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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