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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바다건너 ''릴레이 내리사랑'';

작성자
별**
작성일
2001-06-13
댓글
0
조회수
1041
그때 그 시절이 있었습니다. 달동네 판잣집에 연탄이 떨어져 온 식구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살았던. 행여 김치 반찬뿐이라도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던.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미제 청바지 걸쳐입고 마냥 우쭐댔던….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 초부터 이른바 ‘개발’이란 말을 알게 된 70년대까지. 그 무렵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땐 모두가 힘겹고 가난했습니다.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불편하거나 힘들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지요.


그런데 당시 이역만리 타국의 이름 모르는 그 누구로부터 자선을 받은 한국 어린이가 꽤 많았습니다. ‘플랜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 아동구호단체에서 매년 2만5천여명에게 수양부모를 맺어주고 후원을 보냈답니다. 대개 부모 중 한분을 여의고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양친(수양부모)회’란 한국 이름으로 알려졌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이제 장년의 어른이 됐습니다. 지겹도록 가난이 서글펐던 시절. 때 되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누런 상자 속 옷가지와 편지 한통, 그리고 얼마간의 용돈. 그때는 정말로 천사가 있는 줄 알았답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성장한 아이들이 이제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내리사랑 양친회’. 이국의 수양부모들이 전해준 사랑을 온전히 돌려주고자 나선 ‘그 시절 아이들’이 올 2월 결성한 모임입니다. 아직은 20여명뿐이라 많이 모이진 못했습니다. 그 옛날 자신들이 받았던 것처럼 형편이 어려운 외국 어린이의 수양부모가 되어 매달 편지와 선물, 그리고 2만원씩의 후원금을 보내줍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입니다.


모임의 회장을 맡은 이장훈씨(52)는 서울의 한 중소기업 사장입니다. 그는 두살배기 아기때 6·25를 맞았답니다. 전쟁 발발 나흘만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후 홀어머니 슬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습니다. 코흘리개였던 부산 피난시절 ‘양친회’의 손길이 닿았답니다. 나이가 어릴 때라 돈은 잘 모르고 ‘새 옷’을 받을 때마다 펄펄 뛰며 좋아했던 기억이 잊히질 않는답니다. 그는 지금도 당시 사진 한장을 지갑 속에 꼭 지니고 다닙니다.


“편지를 받고나면 꼭 답장을 써야 했지요. 답장 쓰기 싫어서 꾀를 부리다 어머니에게 꿀밤맞은 적이 많았어요. 아마도 후원받는 어린이들에게 주는 과제였겠지요. 그래도 편지와 선물이 오는 날이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어요. 그것이 제가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전북 익산에서 꽃잔디 농장을 경영하는 송호윤씨(52)는 좀 특별한 경웁니다. 몰락한 지주 집안의 아들로 12살때 상경해 3~4년간 양친회의 원조를 받았답니다. 한달에 2,000~3,000원이었던 기억. 대개 초등학교 저학년 또래였던 피후원 어린이들과 달리 영어 알파벳이라도 아는 중학생때 수양부모를 만난 점이 색다르지요. 그래서 후원자의 이름을 나중까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수지 프란켈’.


시골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사는 게 꿈이었던 그는 당시 “제가 나중에 커서 큰 농장 주인이 되면 ‘양친님’을 꼭 초대하겠다”는 편지를 썼고 19살때 귀향해 땅을 일구기 시작했답니다. 한뼘 과수원으로 시작해 젖소 목장을 거쳐 이젠 3만여평의 큰 농장을 맨손으로 개척했습니다. 수양부모와의 약속이 마음의 빚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심히 살아가는 힘이 된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지난 97년. ‘플랜 인터내셔널’이 한국지부를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가 “수지씨를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몇차례의 수소문 끝에 도착한 답장. 예전의 양부모는 놀랍게도 자신과 동갑내기로 미국 캔자스에서 4명의 자녀를 두고 사는 아줌마였습니다. 그녀 또한 중학생 시절 학급 반장을 하면서 반 아이들의 성금을 모아 한국 아이를 도왔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이건 기적이에요. 나의 작은 도움이 당신의 인생에 변화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이 성공해서 내게 연락을 준 것만으로도 귀중한 선물이 됐습니다”


송씨는 다음달쯤 수지씨를 자신의 농장으로 초청할 예정입니다. 꿈에도 잊지 않았던 40년 전의 약속. 그는 5년째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11살 소녀 셀레마트도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자그마한 열쇠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 유영수씨(41)는 양부모 개인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또다른 방법으로 내리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서울 봉천동 산동네에서 지낸 어린 시절. 철마다 건강검진을 시켜주고 덕수궁·어린이회관 나들이를 시켜준 양친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승용차를 장만한 4년 전부터 매주 이틀씩 이웃의 뇌성마비 장애 어린이 2명을 차에 태워 병원에 데려다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나서 혹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옛날 어렵던 시절 얘기를 꺼내는 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냐”,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불우한 어린이들이 많은데 머나먼 외국 아이들을 도울 일이 있느냐”고. 하지만 이들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작은 정성이었지만 그 때문에 인생이 바뀔 만큼 소중한 후원으로 성장한 우리를 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이든 외국이든 작은 정성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이들처럼 하나둘씩 주위의 누군가에게 내리사랑을 시작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날이 훨씬 앞당겨질 것입니다.


-[취재수첩]한국, 수혜국서 지원국 반전불구 최하위-


‘플랜 인터내셔널’은 1937년 스페인 내전으로 부모와 집을 잃은 전쟁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민간 아동구호단체다. 한국에서는 53년부터 79년까지 26년간 2백억원이 넘는 후원금을 지원했다.


오랜 기간동안 수혜국 입장이었던 한국은 96년 수혜국 중 최초로 지원국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예전의 ‘양친회’가 ‘플랜 코리아’(www.plankorea.or.kr)란 이름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양친’은 ‘수양부모’란 뜻의 영어 ‘foster parents’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한국은 현재 선진 13개국과 함께 40여개 후진국 어린이들을 수양부모 결연을 통해 돕고 있다.


하지만 ‘지원국’ 한국의 현실은 그다지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지난 5년간 플랜의 수양부모 결연에 참여한 국민이 불과 1,000여명. 후원국 중 꼴찌다. 우리나라보다 늦게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변신한 태국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플랜 본부는 한국지부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이젠 우리보다 못한 이웃을 돌아보는 작은 정성이 필요한 때다. (02)3444-2216


/차준철기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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