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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어려웠던 시절 배움의 길 열어주신 ‘은덕’px,auto

작성자
이**
작성일
2000-10-05
댓글
0
조회수
783




학교길은 시오리. 논둑길, 산길, 신작로 다 지나서야 읍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1시간 넘게 달려왔으니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 한참이 지나서야 선생님 말씀이 들린다. 그런 길에서도 한손에 가방을 들고 다른 한손엔 단어장을 들고 외우며 다리가 휘어질 즈음 주린 배 움켜쥐고 집에 도착한다. 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맛있는 간식이 아니라 사계절 가리지 않는 농사일과 집안일. 나보다 더 가난해서, 또는 공부 못해서 중학교도 못간 친구에 비하면 감지덕지해 공부는 제쳐두고 무슨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일어나지 못했다. 아직 40세에 불과한데 중풍이란다. 그 뒤로 돌아가실 때까지 거동이 불편해 누워 계시는 날이 많아 우리가 돌봐드려야 했다. 나는 그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초등학교 2학년 여동생을 깨워 밥을 짓게 하고 나는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려가야 했다.


중3때 친구들은 진학한다고 방과후에도 학교에 남아 공부를 했다. 나는 명문고 진학을 위한 특수반에 편성되었는데 꼭 필요한 과외 학습을 못 받고 집으로 가곤 했다. 그때 윤병현 담임선생님이 부르더니 “왜 진학을 포기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비롯해 이런저런 집안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나의 아버지를 만나자고 하였다.


선생님을 만나고 온 아버지는 “돈이 덜 드는 시골 고교라도 널 진학시키란다”며 난처해 하셨다. 그 뒤에도 선생님은 그 먼길을 걸어 우리집에 와서는 아버지를 자주 설득했다. 고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취직이 쉽다는 말에 아버지는 끝내 허락하였다. 그 덕분에 나는 읍내 농업학교에 진학했고 선생님은 학교에 들러 나의 가정형편을 말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도청 공무원이 된 내가 길을 가는데 뒤에서 “어이, 어이”하며 누가 불러 돌아보니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그때에도 세상 사는 지혜며, 상사 모시는 방법 등을 세세히 일러주고 총총히 사라지셨다.


“선생님, 그 은덕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따뜻한 차라도 한잔 올리며 제 안부와 함께 동창들의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종원·전남 담양군 무정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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