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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낮은 데로 임한 소외된 이웃들의 벗,

작성자
이**
작성일
2000-10-05
댓글
0
조회수
542

"어디든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공동체에 그가 있었습니다. 그 일을 궤도에 올려놓곤 다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곳을 찾아갔습니다. 안주하기 보단 도전과 개척, 봉사속에 바친 아름다운 삶이었죠. "

지난 1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한 안치열(安致烈)전 경희대 총장의 빈소에서 만난 음성 꽃동네 신상현(辛相賢)수사는 이렇게 고인을 회고했다.

1944년 평양의전 방사선과를 나온 安전총장은 대한방사선학회장.대한치료방사선과학회장.원자력청장 등을 역임하면서 걸음마 단계에 있던 국내 방사선의학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인물이다.

실제 그의 이력서에는 이런 개척자적 면모를 보여주는 수많은 ''초대(初代)'' 자가 등장한다.

적십자병원 초대 방사선과장(56년)을 비롯해 초대 가톨릭의대 방사선과 주임교수(57년).성모병원 초대과장(58년).초대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장(63년).초대 경희의료원장(71년).경희의료원 초대 치료방사선과장(84)등.

하지만 그는 수많은 자리를 거치면서 학자로서 소임을 마친 데 안주하지 않고 노년의 삶은 온전히 나환자들을 위해 바쳤다.

88년 정년퇴임과 동시에 그는 국내 유수한 병원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음성 꽃동네로 내려갔다. 3만여 꽃동네 가족들과 함께 꽁보리밥을 먹으며 동고동락 하면서 인곡자애병원을 일으켜 세웠다.

평생 수집한 의료서적과 집기를 꽃동네에 기증했고, 경희의료원과 꽃동네 인근 병원에서 내다버린 의료장비를 모아 환자들을 진료했다.

40년간 대한YWCA연합회 총무를 지낸 부인 박순양(朴淳陽.74)씨도 곁에서 거즈와 소독솜을 만지며 남편의 튼튼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음성 꽃동네에서 5년간의 인술을 베푼 뒤 95년에는 자신을 더욱 필요로 하는 가평 꽃동네의 노체자애병원 의무원장에 부임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 탓에 심장혈관 수술을 비롯해 세 번의 대수술을 받았으나 퇴원만 하면 다시 꽃동네를 찾아와 나환자들의 벗이 됐다.

조용호(曺龍鎬)경희대 의과대학장은 "총장님은 봉사를 하면서도 철저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실천했다" 며 "아마 하나님 다음가는 성품을 가진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라고 말했다. 그의 겸손함을 말해주는 두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경희대 총장 시절(1980~82)그는 경비실 직원이 인사를 하면 자신도 허리를 90도로 굽혀 깍듯이 맞절을 했다.

한 직원이 "총장님, 앞으론 제발 인사를 받기만 하십시요" 라고 만류하자 "예. 알겠습니다" 라고 답하면서 또 한번 90도로 허리를 굽혔다고 한다.

경희대 교수들을 인솔해 꽃동네에 들렀을 때의 에피소드. 오웅진(吳雄鎭)신부가 누군가를 초조히 기다리자 이미 몇시간 전에 도착해 의료봉사활동을 벌이던 그가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라고 물었다.

吳신부가 "경희대 安총장님이신데 아직 안 오시네요" 라고 하자 그제서야 "제가 그 사람입니다" 라고 말해 두 사람이 박장대소 했다고 한다. 수년 전부터 꽃동네를 찾았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총장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그는 평생을 전셋집에서만 살다 몇년 전에야 경기 일산에 집 한 채를 겨우 마련했고 학교에서 내준 대형차를 마다하고 손수 경차를 몰고다닐만큼 청빈했다. 이런 고인이었기에 학생들도 그를 ''날개없는 천사'' 라고 불렀다고 한다.

吳신부는 "고인은 의사요, 공직자요, 대학총장이란 화려했던 경력을 가졌지만 정반대로 가장 가난한 삶을 살면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좇는 이들을 부끄럽게 한 분" 이라며 영정 앞에 머리를 숙였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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