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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할머니 관광가이드 5인방

작성자
기**
작성일
2001-02-28
댓글
0
조회수
813
< 아름다운 칠순, 빛나는‘한국의 미소''>




올해로 김포공항 출퇴근 35년째. 정장차림에 곱게 화장한 얼굴, 50대 중반이나 돼 보일까. 하지만 환갑을 넘기고 칠순잔치까지 끝낸 공항의 민간 외교사절단. 누가 바바리코트를 걸친 영국 할머니들을 최고의 멋쟁이라고 말하는가. 여기, 휴대폰을 액세서리 삼아 목에 걸고 다니는 만년 청춘이 있는데.

2001년은 ‘한국 방문의 해’. ‘할머니 가이드 5인방’이 대한민국 안내 만큼은 확실히 책임지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세련된 매너와 유창한 외국어 솜씨. 카랑카랑하지만 기품이 있는 목소리. 해방 전후 명문대를 졸업한 재원들로 196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소개하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들이다.

국내 여행안내 1호 면허 소유자 임춘실 할머니(76).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임할머니는 화끈하면서도 털털한 성품으로 ‘상하이 언니’로 통한다. 중국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낸 그는 1965년 관광 가이드로서는 처음 국가면허증을 땄으며 정·재계 주요인사들의 동시통역을 맡았다.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안선 할머니(76). 안할머니가 없었으면 굵직굵직한 한·일외교 관련행사 진행은 어려웠을 터.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똑 부러지는 성격으로 일을 맡으면 뒤처리까지 확실하게 해낸다. 임할머니와 함께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현직에 몸담고 있는 최고령 가이드는 투어시스템코리아(TSK)의 고경숙 실장(70).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나온 그는 20여명의 후배들에게 ‘호랑이 선배’로 통한다. 최근 일본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원들의 제주도 워크숍을 맡아 ‘1호차’를 진두지휘했다. 재택근무를 권유했지만 아직은 젊기에 “No”.

한진관광의 창립멤버이자 정식직원인 임춘자 할머니(69)는 문화답사 전문가.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환갑이 지난 나이에 경희대에서 관광학 석사학위를 받은 ‘공부벌레’다. 외국인 교수나 교사들이 역사의 원류를 찾아 한국에 왔을 때 고증작업하는 일을 돕고 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김경신 할머니(69)는 일본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교단에 서기도 한 선생님 출신이다.

할머니 5인방에게 김포공항은 마음의 고향이자 보금자리다. 일흔여섯의 임춘실 할머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호탕하게 웃는다. “언제부터 에어컨이야. 호텔은 또 뭐고. 의사처럼 국가에서 내주는 면허증이 있어야 외국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지. 전화가 없으니까 모닝콜도 없었어. 일일이 방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안내했어”

그러자 동갑내기 안할머니가 “외국에서 오는 귀한 손님들을 청와대로 모셔다 드렸지. 박정희 대통령을 한두번 봤나. 국제선 비행기는 48명이 정원이었지. 일반인들은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던 시절이야”라며 맞장구를 친다.

흐르는 세월을 잡지는 못했지만 붉은 립스틱을 살짝 바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달라졌다면 돋보기 안경을 한개씩 걸쳤다는 것. 경기 분당에서 자원봉사 차원에서 무료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김경신 할머니가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는데 일본문화가 개방되더니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기까지 되네요”라며 엷게 미소짓자, 이번에는 젊은이들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는 현역 할머니 가이드들이 나섰다.

“깊지는 않더라도 넓게는 알아야잖아요. 한국 프로야구팀이 몇개냐고 물어보는데 글쎄 모른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있다니까요.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도 눈뜨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뉴스를 듣는 게 우리들이잖우”

칠순의 고경숙 실장이 팀장이라면 예순아홉의 임춘자 할머니는 현장 가이드. 1주일이건 열흘이건 젊은이들과 먹고 자며 관광하는 게 더 없이 행복하단다.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을 300~400명씩 데리고 부여·경주로 가보세요.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기념관을 찾아 식민지시대를 돌아볼 때는 일본인들도 과거의 잘못된 역사는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할머니 5인방은 ‘올해가 한국 방문의 해’라는 말을 꺼내자 약속이라도 한듯 한 목소리로 말한다. 반만년 이어온 찬란한 우리 문화에 역사투어는 사라지고 덤핑관광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걱정이라고. ‘기생관광’에 ‘때밀이 관광’이 유행하자 일본에선 “한국인들은 ‘사람’을 팔아먹고 산다”고까지 비아냥거린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게 겨우 이것뿐인가 싶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고.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할 때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질문들. “왜 한강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됐지요NULL”. 안전불감증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없애기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가며 “나사가 조금 풀어져서”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저건 뭐죠” 하는 물음. 오대산이며 가야산이며 산속 깊은 곳이나 도로 곳곳에 서있는 뾰족뾰족한 첨탑과 화려한 장식물. 바로 러브호텔들이다. 대답은 “아, 음식점이에요. 왜들, 불고기 좋아하시지요NULL”

할머니들은 정부가 관광상품을 개발해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자신들이 직접 투어상품을 만들었다. ‘강원 정선에서 외국인과 함께 하는 아리랑투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임진각에서 부르는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강화도 애기봉 미스터리 투어’…. 할머니들은 이젠 온국민이 관광 가이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래서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다고 한다.

외국인을 데리고 국내 투어를 할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리면 줄서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줌마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문도 잠그지 않은 채 볼 일을 보는 모습.

“한국인의 꼴불견, 화장실문화 좀 바꿔봅시다”.

-[취재수첩]“반만년의 우리 역사 공부하지 않고 제대로 알릴수 있나요”-

김포공항시대부터 인천신공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공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할머니 가이드 5인방이 모처럼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조선호텔 커피숍에 모였다. 40여년 세월 만큼이나 주름살이 패긴 했지만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는 여전했다.

5인방 할머니의 공통점이라면 절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것. 늙은이(NULL)라서 그런지 젊은 가이드들에게 아쉬움이 많다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말이 서툴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 제대로 한국을 알릴 수 있을까.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데도 공부를 안한다.

경복궁을 안내하면서 임진왜란때 전소됐다가 복원됐다는 얘기만 앵무새처럼 되뇐다. 건축양식이나 궁중생활, 경회루, 탱화 그리는 법 등 자랑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순발력이 필요하다. 관광버스가 늦어져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화장실에 다녀오라든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며 안심시켜야 한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자. 삼국시대는 일본 야요이 시대요, 고려시대는 가마쿠라 시대다. 일본에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을 때 한국은 이미 고구려·신라·백제·고려의 정부가 있었다.

5인방 할머니가 가장 걱정스러워 하는 것은 단연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다. 아직 축구장이 완공되지 못한 우리와 달리 일본은 자원봉사자들이 한국말을 배우는가 하면 유니폼을 맞춰입고 세계 각국의 선수들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있다. 외국인 선수들과 응원단이 대거 몰려올 텐데 음식이나 숙소 등 서비스 문제는 잘 준비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게 시급하다.

“누가 이 할마씨들에게 20~30명 관광객을 모아주겠어. 열심히 공부하니깐 인천신공항시대에도 뛸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정유미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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