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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돋보기 너머 다가온 배움의 ''신세계''

작성자
기**
작성일
2001-03-15
댓글
0
조회수
696
서울 관악구 봉천동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만나는 조그만 쌀가게에는 늘 백발의 소녀(?)가 앉아 있습니다. 손님이 들지 않을 때는 책상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자 펜글씨 교본을 따라 또박또박 한자를 적고 있습니다. 아들이 사줬다는 만년필과 안경 위에 덧씌워진 돋보기가 무거워 보이지만, 한칸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메워나갑니다.


올해 환갑을 맞는 김복이씨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답니다. 50년동안 간직한 꿈을 이제서야 이뤘으니까요. 남들이 들으면 “그게 뭐야”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양원주부학교 3학년2반 ‘왕언니’에겐 너무도 소중한, 그래서 매일 밤 소원을 빌 정도로 이루고 싶은 꿈이었답니다. 그건 바로 ‘공부’였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그 또래에게 닥쳤던 시련을 왕언니도 겪었습니다. 아버지는 태평양전쟁때 징용당해 3년 뒤 전쟁터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가 5살때 재혼을 하셨답니다. 왕언니는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부모 얼굴도 모르는 손녀에게 진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지만,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공부를 계속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왕언니의 꿈은 시작됐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꿈 말이죠.


꽃다운 나이 스물둘. 지금은 왕언니의 열렬한 후원자가 된 영감님과 식을 올렸습니다. 그렇다고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니었습니다. 영감님의 목수일로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습니다. 셋방을 전전하며 구멍가게를 하는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감님에게 안면근육이 마비되는 병이 찾아와 왕언니는 우유배달까지 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요. 시누이 도움으로 쌀가게를 시작해 ‘이제는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영감님이 배달을 다니다 교통사고로 몸져눕게 됐습니다. 병수발하랴 쌀가게 꾸려나가랴 몸은 지쳐만 갔지만, 영감님은 오히려 왕언니를 못살게 굴었답니다. 남자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겠지요. 영감님의 등쌀에 왕언니는 우울증과 위장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병에는 특별한 약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특효약을 발견하게 됐지요. 그것은 동네 할머니가 건네준 양원주부학교 안내 전단이었습니다. 자신처럼 못배운 주부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왕언니는 잠을 설칠 정도로 흥분했답니다. 당장 등록원서를 내려 했지만, 보호자(남편)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입학요강을 보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50년 동안 품었던 꿈을 이룰 수 있는데 이 정도야 문제가 안됐죠. 영감님을 설득해 결국 등록을 했습니다.


혹시나 영감님이 학교를 그만두라고 호통치실까 왕언니는 마음을 낮추고 정성스레 영감님을 모셨답니다.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까요. 어느날 왕언니는 영감님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쌀배달 틈틈이 폐품을 모아오던 영감님이 학용품을 주워오신 겁니다. “이걸로 공부해라” 하시면서요. 경상도 사나이의 무뚝뚝한 어투였지만 왕언니에겐 그렇게 따뜻해 보일 수가 없었답니다. 그날부터 영감님도 “질 수 없다”며 같이 공부를 시작하셨답니다. 요즘은 왕언니가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주시기도 한답니다. 한자 뜻을 모르겠다고 하면 자전(字典)을 손수 찾아주는 정도랍니다. 우울증, 위장병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싹 나았답니다.


‘왕언니’라는 별명은 양원주부학교 급우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겠지요. 하지만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공부면 공부, 학급활동이면 학급활동 모두에 열심인 그에게 ‘어린 동생’들이 존경의 뜻에서 붙여준 게 아닐까요? 지난 2월26일 졸업하기까지 받은 상장만 서류철 하나로 모자랄 정도니까요. 그중에서 제일 아끼는 상장은 개근상이랍니다. 수십㎏이 넘는 쌀가마니를 번쩍 들어 오토바이로 직접 배달까지 하는 왕언니. 바쁜 삶 속에서 이룩한 100%의 출석률은 자랑할 만하겠지요. 왕언니는 지난 1년간 중등부 과정을 마쳤고, 이제 고등부 과정을 시작합니다. 고등부 과정이 끝나면 전문부, 교양부, 연구부까지 다 다닐 생각이랍니다. 4월에는 고입 검정고시에 도전할 예정이고요.


왕언니는 요즘 다른 일에 더 바쁩니다. 자칭 ‘학교 홍보요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죠. 주변에 있는 주부들에게 “같이 공부하자”고 조른답니다. 쌀가게 문에는 학교 홍보전단을 붙여놓기까지 했습니다. “이따 배고파지면 이거 먹으레이” 하며 초코파이 한 박스를 내미는 왕언니는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온 우리네 어머니들 말이죠.


그 어머니들에게 왕언니가 한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 안카나. 자식들 재산 물려준다 생각 말그레이. 글마들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줘야 안되겠나. 이제 배움의 기쁨을 누릴 때인기라. 힘들다고, 바쁘다고 핑계대지 말그레이. 내가 예수 다음으로 존경하는 우리 교장선생님이 이런 말씀 안했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꼬…”.


/권오경기자 realboo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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