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menu-icon
mobile-menu-icon
close
close

미담 공유

그늘진 일터 햇살 한줌 ''꿈의 사운드''

작성자
별**
작성일
2001-05-29
댓글
0
조회수
732
-대우일산서비스 그룹사운드 ‘가자’-


“자,다음은 참가번호 8번. 대우 일산서비스 그룹사운드 ‘가자’. 곡명은 자작곡인 ‘꿈’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중앙무대에서 기다리던 보컬 김호영씨(39)는 마이크를 움켜잡았다. 조명은 ‘근로자 가요제’라고 쓰인 무대의 커다란 글씨를 한번 훑고난 다음 호영씨 위에 멈춰 첫 소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영씨는 양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렸다. 조명 뒤에서 송정한씨(34)의 드럼과 함께 김영권씨(33)의 일렉트릭 기타, 김선영씨(31)의 베이스 기타가 폭발적인 전기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리, 대상 타서 우리와 동료들의 꿈을 이야기하자고 약속하지 않았나’. 얼핏 이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 호영씨는 지난 6개월간 수백번을 불러온 ‘꿈’의 첫 소절을 내질렀다.


‘흘러가는 구름 속에 내 꿈을 싣고 바람따라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대우 일산서비스 60여명 동료들의 ‘화이팅 가자’ 플래카드가 객석에서 휘날렸다. ‘낯선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은 어둠 속에 느껴지는 초라한 모습~’.


그랬다. 1년4개월 전 이들은 모두 초라한 모습이었다. 고객들이 사간 차를 수리해주는 그들의 일터 대우 일산서비스에서도 다른 대우 작업장이나 마찬가지로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 ‘불안한 현재’를 걱정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국가경제 위기 속에서 태풍의 눈이 되어버린 그들의 일터. “괜찮냐”는 친척·친구들의 전화가 위로인 줄은 알지만,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하나씩 더 얻었을 뿐이었다.


이때 관리업무과에서 일하는 7년차 호영씨가 이들을 불러모았다. “불안한 현재 대신 ‘내일의 꿈’을 노래하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자”고 했다. 호영씨의 친동생인 정비접수과의 4년차 선영씨, 정비과에서 차를 닦고 기름치는 3년차 정한씨, 자재과에서 온갖 부품을 관리하는 6년차 영권씨는 그날부터 점심시간마다 지하창고에 모였다. 이들은 모두 한때는 학교에서 동네에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왕년의 스타’들이었다. 호영씨와 선영씨의 4형제는 80년대 중반 ‘바람소리’라는 그룹사운드를 조직해 월계동을 누볐고, 영권씨는 가수 이선희를 배출한 인천전문대의 유명 그룹 ‘4막5장’의 멤버였으며, 정한씨도 고등학교 시절 교내 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두드린 전력이 있다.


이미 호영씨는 아내 몰래 카드외상으로 낙원상가에서 2백60만원어치 중고악기를 구입해 놓은 터였다. 멤버들은 검은 방음벽지를 창고에 발랐다. 약간 찌그러진 드럼, 전기기타, 건반, 엠프, 마이크가 들어서자 1평반의 창고는 ‘뮤직 스튜디오’로 마술처럼 다시 태어났다.


‘하늘아 하늘아 이제 다시 가는 거야. 내꿈을 찾아서 떠나는 거야. 의미없는 시간들은 잊어버리고 찾아가는 거야, 떠나는 거야’


‘꿈’의 두번째 소절처럼 이들은 꿈을 찾아 닻을 올렸다. 점심식사를 10분만에 끝내고 지하 기계실 옆 작은 창고에 모여들어 30분씩 노래를 불렀다. 몇개월간 기존 가요들로 음악을 맞춰보다가 노동절날 TV에서 중계되는 ‘근로자 가요제’를 보고 모두들 무릎을 쳤다. “내가 작곡해 놓은 노래가 있으니까 우리도 내년에 한번 나가보자”. 호영씨가 제안을 했고, 선영씨는 가사를 쓰겠다고 자청했다. 지난해 10월 ‘꿈’이라는 노래가 태어났고, 팀 이름도 ‘가자’로 결정됐다.


영권씨는 “우리 모두 꿈을 향해 가자는 의미죠, 뭐. 참가팀들 모두 기존 노래를 들고나왔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꼭 자작곡이어야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모두 힘든 때에 “웬 노래냐”는 핀잔을 들을까봐 점심시간에만 지하에서 연습하기를 몇달. 그런데 회사 동료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았다. “점심시간만 되면 땅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아지트는 곧 들통이 났다. 다행히 127개팀이 참가해 6개팀이 뽑힌 서울·경기 예선에서 통과, 체면을 건지게 됐다.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사건도 있었고, GM 매각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대우 이야기만 나와도 ‘지겹다’며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던 정한씨도 한마디했다.


대우자동차판매 소속인 그들의 일터는 아직 감원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본선에서 상을 받아 우리의 이야기를 방송에 대고 하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일반 시민들이 외면한다면 대우 동료들에게라도 절대 ‘꿈’을 버리지 말자고 격려해주자”는 다짐이었다.


‘맑은 햇살에 이슬처럼 고운 꿈을 찾아서 소리없이 느껴지는 시간을 찾아서~. 언제나 기다릴 수 있는 남겨진 시간을 찾아 떠날 거야. 떠나가는 거야’


마지막 소절이 끝나고 객석에선 우레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사회자는 선영씨에게 물었다. “자작곡인데 ‘꿈’은 어떤 꿈을 말하는 겁니까?” “대우자동차의 희망찬 내일입니다” “그럼 팀 이름 ‘가자’는요?” “그 꿈을 향해 가자는 것이죠”. 더 멋지게 말하지 못한 게 후회되지만, 그들은 동료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꿈을 버리지 말자고.


‘가자’는 금상을 받았다. 그러나 금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호진 노동부 장관이 대회 마지막에 말한 “대우를 살려야 된다”는 한마디였다. 대회가 끝나고 제작진에게 달려가서 “우리 노래 다 잘라도 좋으니까 장관의 말은 편집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제작진의 “그러마”라는 다짐을 받고는 자축파티를 했다. 모두 술에 약해 술자리를 갖지 않았던 이들은 큰맘 먹고 소주 한병을 놓고 삼겹살 파티를 벌였다. 상금 1백만원 가운데 남은 90여만원은 항상 침흘리며 눈독만 들여왔던 중고악기를 사는 데 썼다.


대회가 끝난 다음에도 이들의 점심시간 연습은 그치지 않았다. 새로 장만한 악기를 들고 작은 지하창고에서 ‘꿈’을 부른다. 여전히 회사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불안한 현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오듯 이들의 꿈도 이뤄질 날이 오지 않겠는가. 이들의 노래는 그들에게, 그리고 자신들에게 ‘꿈’을 잊지 않게 하는 울림이 될 것이다. 꿈과 절망은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고 그 누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취재수첩]한평반의 음악창고는 ‘마법의 방’-


정비를 기다리는 세단, 경차, 봉고차의 행렬과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들, 에어 콤프레셔 관들과 전기배선의 벽을 지나서 마주치는 계단. 이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면 더 이상 얼씬거리는 그림자는 없다. 온갖 기계장치들이 이웃하고 있는 지하 기계실 옆의 작은 방 한칸.


이 작은 ‘음악창고’는 마법의 방이다. 작업복을 입은 성실한 네 근로자는 이곳에만 들어서면 끼 넘치는 가수가 된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빛나게 하고, 다리를 떨고 팔을 휘젓게 만들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걸까.


검은 스펀지로 된 방음벽에서는 ‘음악 냄새’가 난다. 음악창고 안에 놓인 악기, 방음벽지의 금속성 냄새와 방 밖 기계실에서 넘어온 기름냄새가 이들의 땀방울과 칵테일되어 제3의 ‘마술적 반응’을 일으킨 것 같다. “이 냄새에 중독되었나봐요. 이 황홀한 음악냄새를 맡으러 점심시간마다 오지 않으면 안돼요”라고 선영씨는 말했다.


작은 창고 안에는 길다란 형광등 하나가 켜져 있다. 위이잉 하는 선영씨의 묵직한 베이스 기타 소리는 그 형광등 불빛을 떨게 만든다. 하도 두드려서 찌그러진 정한씨의 드럼이 제몫을 다하려는 듯 몸부림치고, 작은 엠프는 터져나갈 듯한 영권씨의 기타음과 호영씨의 노랫소리를 한아름 품었다 내쏟는다. 점심시간마다 지하 구석의 작은 음악창고는 이렇게 네 멤버의 연주로 온 공장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멤버들의 ‘꿈’이 동료들의 꿈을 노래하는 것이었기에 60여명의 동료 근로자들은 그들의 매니저를 자처하고 나섰다. 작은 구석 음악창고는 이제 외롭지 않다.


/이무경기자 lmk@kyunghyang.com/






첨부파일
비밀번호 입력
본인확인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입력
본인확인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