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menu-icon
mobile-menu-icon
close
close

미담 공유

영광댁 사는 이야기

작성자
제**
작성일
2002-07-12
댓글
0
조회수
2611
바쁜 들녘이다. 알갱이 없는 보리 베어내고 이모작들 심느라 가을걷이 때보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베어낸 보리를 집어삼키는 하얀 연기가 사그라지고 나면 논 갈고 물 잡아 이모작 모들로 논을 메운다.

보리타작에, 모내기에 정신없던 백수들녘은 막바지 모꽂기에 이앙기가 바삐 돌아가고 ‘뜬모’ 아줌마 부대를 태운 경운기는 오랜만에 한가한 도로를 전세 내고 달린다.

온 나라가 월드컵에 정신팔려 붉은 물결에 정신없어도 담배며, 논의 모들이며, 수박모종이며, 대파들은 제 할일을 마다하지 않는 듯 쑥쑥 커가고 있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벌써 주책맞게 활짝 펴 있다.

오늘은 4강전이 있는 날이다. 무적함대 스페인과의 결전을 앞두고 온 나라가 초긴장상태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염없이 들녘에 눈을 주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한분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간간이 뜬모에 허리 굽힌 아저씨, 아줌마의 노동만이 있을 뿐 들녘은 조용하다.

오늘은 영광군민 모두 실내체육관에 모이란다. 우리도 붉은악마가 돼보자고….

아침 등굣길엔 아이들이 붉은색의 물을 들이더니 집에 오는 길엔 전교생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이 되어 있다. 영광도 월드컵 4강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체육관엔 붉은색과 태극기로 치장한 학생무리와 어른들과 함께 나온 꼬맹이들, 그리고 젊잖게 자리잡은 어르신들, 손자 업고 나온 할매들까지 각종 세대가 모여들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 소리는 묻혀버리고 경기장의 붉은악마의 외침에 맞춰 어설프게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오! 필승코리아’를 외쳐본다.

전반전 초반 열심히 응원하는데 같이 온 둘째가 집에서 보자고 조른다. 지난번 남천로(최근에 개통된 장터 옆의 신작로) 거리응원전 때도 15분을 못 넘기더니 오늘은 나도 붉은색 옷 챙겨입고 왔는데 괜히 데려왔다 싶다. 아들놈 성화에 밖으로 나오니 체육관 마당에서도 꿈나무들이 응원은 뒷전이고 저희들도 골 넣기에 바쁘다.

영광시내의 미장원, 옷가게며 서점엔 손님 하나 없고 주인들만 축구공 움직임에 애달아한다. 영광터미널 앞 과일노점 차앞에는 삼삼오오 아저씨들이 축구삼매경이다. 수박 한덩이 서리해도 모르겠다.

차도에 들어서니 사람도 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한창 김매기에 바쁠 터인데 모두들 월드컵 앞에 잡혀 있나 보다.

4강은 느긋하게 볼 줄 알았는데 욕심이 더해져 응원하는 데 혼신을 다한다.

“왜 <여인천하>는 안 하냐? 맨날 축구만 하냐?”며 월드컵에 시큰둥하던 아버님도 지난번 이탈리아전 이후부터 재미붙여 오늘은 농사일 제쳐놓고 “연장전은 몇분이다냐? 승부차기는 몇번이나 찬다냐? 저그 잘 막는 사람은 누구다냐?” 자꾸 물어보며 애타하신다. 심장 뛰어 축구는 보지도 못 하시는 어머니는 마침 떼(잔디) 묶으러 가셔서 외려 다행이다.

후반과 연장까지 죽을힘을 다하더니 골차기까지 간다. 승부차기는 운명이라고 위로해봐도 뛰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동네 밖 어귀를 맴돈다. 눈앞의 고추밭에 간절한 맘을 주어보고 잔뜩 찌푸린 하늘엔 축하의 한 줄기 비를 기원할밖에….

동네가 갑자기 들썩인다. “와… 골인! 이겼다.” 소씨아저씨네, 미정이네, 동네 앞 군부대 군인아저씨들 할 것 없이 박수소리와 함성이 동네 개짖는 소리에 섞여 더욱 크게 울린다.

도시는 축제분위기에 휩싸이는데 아버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작업복 걸치고 나가시고, 동네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논으로 밭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농촌 들녘은 김매기로 다시 바빠진다.
첨부파일
비밀번호 입력
본인확인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입력
본인확인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