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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제자들의 손에 들려 되돌려 보낸 계란 한 줄px,auto

작성자
김**
작성일
2002-05-30
댓글
0
조회수
438

아이들 손에 돌려보낸 ''계란 한 줄''

1964년 봄.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3월 15일에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웃 군의 조그만 학교, 그것도 새로 개교를 하면서 분교로 출발을 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것도 감지덕지할 형편이었으니, 내가 졸업한 63년은 교대 1회 졸업생과 사범학교의 졸업생이 한꺼번에 나오게 돼 ''교사''되기가 힘들 때였다. 특히 전남에서는 3개 사범학교와 2개 교대에서 졸업생을 배출하여, 필요인원의 거의 2배가 넘는 졸업생이 한꺼번에 발령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꼬박 1년을 기다린 끝에 발령을 받은 것이니 감사하고 반가울 뿐이었다.
그러나 잔뜩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학교에 도착한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학교''였지, 요즘 각 마을마다 있는 농산물 저장 창고보다 나을 게 없는 형편이었다.
논바닥에 덩그라니 서 있는 양배 지붕의 교실 네 칸, 국기 게양대 하나, 논바닥을 파서 생소나무를 베어 껍질만 벗겨서 기둥으로 묻고, 대나무로 외를 엮어 흙을 발라서 벽을 만들고, 그 외에는 이엉을 얹어 지붕을 삼고 가마 떼기를 매달아 겨우 가릴 수 있게 문이라고 달아 놓은 화장실 두 칸이 밖에서 보는 학교 건물의 전부였다. 운동장은 논둑이 그대로 남아 학교 경계를 표시하고, 운동장이 될 논바닥에는 벼 그루터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아이들 책걸상과 교탁, 48건 짜리 오르간 한 대, 이것이 이 학교 전 재산이었다. 이렇게 엉성한 시설에서 배워야 할 아이들은 7학급 200여 명이나 되었으니, 요즘 생각하면 임시수용소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 무렵의 학교 시설이 요즘에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열악하기는 하였지만, 신설학교 라서 더욱 형편없었다.
어찌되었든 학급 담임을 맡은 지 4주쯤이 되자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각 가정의 형편을 알아보고 아이들의 지도에 참고할 자료를 수집하라는 가정방문 기간이 되었다. 초년병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에는 연중 행사로 당연히 치르던 것이었으니, 선배님들의 지도를 받아 방문에 필요한 자료를 꼼꼼히 준비하여 가지고 출발하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마을은 나중에 틈틈이 라도 갈 수 있으니까, 우선 먼 곳의 마을부터 찾아가 보기로 하고, 2학년의 오전 수업을 마치고서 그 마을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아지랑이 피는 논둑 길을 걸을 때는 참으로 기분이 날아갈 듯만 싶었다.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서로 차지하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겨우 한 사람이 비켜 갈 정도의 길이었다.
가정방문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는데
''집안 청소 상태를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씨나 생활태도를 알 수 있 으며, 특히 화장실이 가장 눈에 띄는 곳이라고 했고, 손님이 오시면 신발의 방 향을 돌려놓아 드려야 한다''는 말도 해주었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려보내면서 오늘부터 선생님이 여러분의 집을 찾아가는데 00마을부터 가겠다고 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선생님의 손을 잡고 같이 갈 붙임성 있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는데, 첫 번째에 찾아간 그 여자아이네 집에 들어서니 신발이 정말 제대로 돌려 놓여져 있었다.
나는 ''이게 교사의 힘이구나''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그 마을에서 몇 집을 돌아보고 농사일에 바빠서 집에 안 계신 분들이 많아서 이웃마을로 향했다. 그 마을은 이 학구에서 가장 살림이 어려운 마을이라고 했다.
이 때 내 뒤를 졸랑대며 따라 다니는 아이들이 세 명이 있었다. 반장과 이웃에 사는, 지금은 박사가 되어서 서울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아이, 그리고 눈이 큰 이웃마을 아이였다. 길을 잘 모르는 나를 일일이 안내해주는 아이들을 따라 마을에 들어섰다. 찾아갈 집은 아버지가 상이군경이어서 살림이 무척 어려운 아이 집이었다. 요즘처럼 국가에서 원호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상이군인이라며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어디 가면 속이 상해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아서 다들 무서워서 피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까닭에 잘 먹지 못해서인지 아이의 발육상태도 아주 좋지 못하고, 병약해서 자주 몸이 아프곤 하는 아이였다. 한 달이 겨우 지나는 동안에 두 번씩이나 결석을 할만큼 허약한 아이여서 꼭 부모님을 만나 보고 싶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첫 번째 집의 마당에서 마침 아주머니들이 베를 매고(베를 짜기 전에 날줄에 풀칠을 해서 말리는 작업) 있어서 그 아이의 집을 묻기 위해 다가갔다. 순간, 내가 다가선 줄을 모르는 어느 아주머니가
"선생들이 왜 가정방문을 다니는데?"
"글쎄, 뭐 계란이라도 한 줄 얻어먹으려고 그러겠지 뭐"
하는 말을 듣고 말았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져 버렸다.
''선생들이 가정 방문을 하는 것이 겨우 계란이라도 얻어먹기 위해서란 말인 가NULL 그렇게 불신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NULL''
이렇게 생각을 하니 더 이상 가정방문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 때묻지 않은 초년병 교사에게는 방망이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뒤따르는 아이들을 가만히 불러,
"야 ! 그냥 가자. 오늘은 그만 돌아야겠다"
하고는 돌아섰다.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서
"왜요? 선생님, 다 왔는데요"
"저기가 00네 집이예요."
하면서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다가왔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져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처음 마을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들려보낸 계란 한 줄(열 개)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정말 이러니까 그런 소릴 듣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얼굴이 붉어지며,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죄 없는 아이들에게 역정을 내어서
"왜 그런 걸 가지고 왔어?"
하고 소릴 치니까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아까 내어놓아도 선생님이 안 드시니까 가져다 드리라고 주셔서..."
하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이곳이 하숙을 해줄만한 집도 없는 농촌마을이어서 동료직원 한 사람과 자취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학부형은 밥반찬이라도 하라고 나를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들려 보낸 것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더 이상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어서
"나는 여기서 얼른 학교에 가봐야 하니까, 그것은 도로 가져다 드리고 집에 가 서 숙제하고 공부해라"
하고 돌려보내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논둑 길을 걸어서 학교로 돌아오고 말았다.
학교에 돌아오니 그 마을에 사시는 선배선생님께서 오후반 수업을 하시고 나오시다가 나를 보고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느냐?"
고 물으셨다. 나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씀 드렸더니, 선배 선생님은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학교 행사를 마음대로 그만두고 오면 어떡하냐"
고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듣고서도 가정방문을 할 자신이 없다고 버티면서, 기어이 가정방문을 그만 두고 말았다. 다행히 분교였기 때문에 교장, 교감선생님이 안 계신 학교여서 더 이상 꾸지람을 듣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교장, 교감선생님이 오셔서 독립교가 되었지만, 역시 일제히 하는 가정방문은 하지 않았다. 2년 동안 그 학교에 있으면서 가정방문을 한 기회는 몇 번 있었다. 물론 전체를 다 도는 것이 아니라, 결석을 한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경우, 아픈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경우, 학교 업무 관계로 마을 유지들을 찾아간 경우들이었지만, 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 한마디가 귓속에서 쟁쟁하게 울리곤 하였다.
담임이 찾아오면 내어놓을 것이라곤 집에서 기른 닭이 낳은 달걀 한 두 개가 고작이던,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아직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촌지라는 말이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추신 * 첫 발령을 받아 첫 가정방문을 하던 날의 모습이며, 이 일로 하여 38년이 지난 아직도 자부하건데, 촌지에 대해 추잡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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