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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저의 가족에게 칭찬을.....

작성자
김**
작성일
2002-08-07
댓글
0
조회수
435
199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다고 모두들 바쁘다. 올림픽의 호경기를 믿고 사람들은 서울로 오는데 나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파란바다, 정다운 친구들이 있는 내 고향 완도! 나의 어린 시절 고운 꿈을 키웠던 그곳에 새로운 직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항상 정다운 이웃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함께 하는 관광버스 기사가 새로운 일터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즐겁게 일을 하다가도 가끔씩 심한 두통에 시달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진통제를 먹으면 괜찮아지곤 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한 3년쯤 지났을까? 집에서 소변을 보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네 병원에서 신장성 고혈압증이니 큰 병원에 가서 종합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한다. 시골의사가 잘못 진단했겠지 혼자 위로하면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서 조직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다. 신우염 ,조직 검사 결과 나온 병명이다. 방치하면 만성신부전증이 되어 한평생 투석을 해야한다고 한다. 만성신부전증, 투석,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다. 왜 내가 이런 단어들을 들어야하는지 실감이 나지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아직은 어리기만 자식들 힘든 일을 할 줄 모르는 아내..... 어떻게 해야할지 쉽게 결정이 나지않는다. 의사선생님은 직장을 그만두고 쉬면서 치료를 권한다. 그러나 지금의 내 입장은 그렇수가 없다. 가장이란 책임감 때문에 일을 하면서 치료를 하게됐다. 그렇게 한 1년 정도 지났을까? 좋아지리라 믿었던 내게 업친데 덥친격으로 B형 간염까지 합세해버렸다. 그동안 치료한답시고 서울을 오가면서 병원비며 교통비에 살림은 말이 아니다. 돈이 없어 서울의 치료를 포기하고 다시 동네 의원에서 치료를 시작했다. 시골의원으로 옮겨 온다는 것은 삶을 포기나 마찬가지다. 그 때부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직장도 그만 두고 방안에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내 보기가 민망했다. 아이들 키우랴, 남편 병간호하랴 ,살림하랴......저녁 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아내를 보면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내기가 미안스러웠다. 기억하기도 싫은1995년 10월 15일, 갑자기 배에 복수가 차 올라 응급실에 실려갔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만 이런 지독한 시련을 안겨줄까? 청천벽력과 같은 병명, 간경변이라니! 살고싶은 생각보다 죽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살아서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는것 보다 죽는게 차라리 나을것 같다. 그러나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산에 있는 동생이 달려와 부산에 간을 잘 치료하는 병원이 있다고 나를 싣고 간다. 한달 정도 치료하였을까? 신기하게도 배에 복수가 빠져 퇴원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검사를 받고 약을 타다 먹으라고 한다. 이제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만에 맞보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들뜬 기분도 잠시, 간 때문에 신장 치료를 소홀이 한 것이 화근이었다. 신장이 너무 나빠져 즉시 투석을 해야한다고 했다. 이틀에 한번씩 기계에 의지하여 4~5시간동안 몸 속의 노폐물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신장이 좋지 않으면 이렇게 투석을 해서라도 얼마만큼의 생명은 연장 시킬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신장외에도 간경변이란 무서운 병이 함께 있다. 당시 의학으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치료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희망도, 소망도 모든것을 접은채 오로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죽음의 공포는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어둠기만한 긴 터널을 혼자서 걸어가고 있다 .어둠속에서 금세라도 무언가 튀어 나와잡아 갈것 같은 공포의 연속이다. 이것은 삶이 아니라 고문과 시달림의 연속이다. 지쳐버린 삶 속에서 그래도 희망의 빛을 찾아준 것은 나의 아들이다. 서울의 어떤 병원에서 간과 신장을 동시에 이식하는데 성공했다는 뉴스를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 16살이던 아들이 그 병원으로 "이메일"을 보냈다."만성신부전증과 간경화로 투병 주이신 아버님께 자기의 간과 신장을 떼어 주고 싶다" 답신은 "한사람이 두 가지 장기를 떼어내 수술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옆에서 이메일을 함께 본 동생이 "한가지 장기는 자기가 떼어 주겠단다. 병원에서는 세 사람이 함께 와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한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자 갑자기 더욱 살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희망도 잠시 1억이란 수술비 앞에서는 삶을 포기해야 했다. 1억! 물론 준비된 현금도 없지만 그 돈이면 모든 가족이 편히 살수 있는 돈이다. 나 한사람 목숨을 위해 모든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삶을 접어야 하는 갈등 앞에 무척 망설였다. 살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돈 때문에 삶을 포기해야 하는 이 처절한 고통을 누가 이해할수 있을까? 또한 돈도 문제지만 나 한사람 살겠다고 어린 아들과 동생에게까지 큰 아픔과 고통을 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았다. 고심 하면서 가족들이 잠든 머리맡에서 몇 일을 울며 지샜다. 그러나 가족들은 달랐다. 검사라도 한번 받아 보자는 권유에 따라 전 가족이 상경하여 검사를 받았다 .수술은 가능 하단다 아니 살수가 있다는 의사의 말이다. 아들은 신장을 제공하고 동생은 간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포기하려던 나의 삶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들에게 맡겨졌다. 돈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몇 번 이고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시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많은 분들에게 참으로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낀다. 2000년 1월 우리나라 최초로 간과 신장을 동시에 생체이식을 받고 다시 태어났다. 아들과 동생 그리고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태어난 나의 삶은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3~6개월 밖에 살수없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장을 제공한 나의 아들은 주위의 따뜻한 배려를 잊지 못하여 사회복지사가 되어 이웃을 돕겠다고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에 다니고 있다. 간을 제공한 동생은 육군중사에서 간 제공과 동시에 전역하여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환한 모습으로 웃어주던 사랑스런 나의 아내! 직장에서 쫓겨 날줄 알면서도 형님 목숨이 우선이라면서 기꺼이 간을 제공해준 착하디 착한 나의 동생!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살려야한다고 신장을 떼어준 나의 사랑스런 아들! 수술비를 위해 직장, 단체 ,개개인 성금을 보내준 나의 이웃들! 모든 것이 소중하고 값지기 그지없다. 이제 나는 내 이웃을 위해 덤으로 얻은 생명을 돌려주기 위해 베풀며 봉사하며 열심히 열심히 살겠다. 또한 이제부터는 언제 어느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달려가 몸과 마음을 받쳐 함께 할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끝으로 이 글을 듣고 계신 분 중에 병마와 싸우고 있는 분이 있으시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용기와 희망이 됐으면 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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