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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어느 ''쌀도둑''의 아름다운 눈물 ,1

작성자
이**
작성일
2001-01-09
댓글
0
조회수
637
그에겐 ‘씻을 수 없는 과거’였다. 두 아들을 잃은 것도 ‘자신의 죄값’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늘 괴로워했다.

인천에서 청소용역업체를 운영하는 조몽식(趙夢植·60)씨는 40년 전부터 그렇게 ‘응어리’를 안고 살아왔다. ‘나는 도둑인데…. 이 빚을 어떻게 갚을까.’


5일 인천 남동구청, 동구청, 남동구 만수4동사무소, 연수구 청학동사무소 등 4곳에는 20㎏들이 쌀 100포대가 배달됐다. 돈이 없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소년소녀가장과 불우노인들에게 전해달라고 조씨가 보낸 쌀이다. 조씨는 지난해 1월부터 매달 70포대씩 이곳에보내왔고 설이 낀 이달에는 30포대를 더 보냈다.


“조금이나마 양심의 죄값을 치르고 싶었습니다.”


조씨의 ‘과거’는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북 김제의 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난 조씨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초등학교 2년 중퇴가 유일한 학력.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


조씨는 20세에 고향에서 이웃집에 쌓아둔 벼 10가마를 본 순간 욕심이 생겼다. 밤에 그의 집 창고로 옮겨 쌓아뒀다가 정미소로 보내 방아를 찧어 맛있는 밥을 해 먹었다. 이 일로 그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전과자’라는 꼬리표보다 더 괴로운 것은 ‘못된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69년 고향에서 아내(53)와 결혼해 73년 인천에 올라왔다. 그는 회사에 다닌다고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넝마주이’ 생활을 시작했다. 쓰레기차에 치여 부상하면서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아내는 “왜 혼자만 몰래 고생을 해 왔느냐”며 넝마주이에 동참했다. 1976년에는 넝마주이를 하면서 번 돈을 들고 고향을 찾았다. 벼를 훔친 이웃집으로 찾아가 그 돈으로 쌀 10가마 값을 변제했다.


조씨 부부는 갖은 고생 끝에 85년 청소용역업체 호남환경을 설립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의 행복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아들이 골수암으로, 2년 후에는 고교 1학년인 큰아들이 위암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큰아들을 잃으면서 본인에겐 중풍이 찾아왔다.


“못된 짓을 해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85년 소년소녀가장 2명에게 5만원씩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15년여 동안 남몰래 봉사활동을 계속해왔다. 그러자 행복이 찾아왔다. 딸은 국가대표 핸드볼선수로 활약했고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 중이다.


96년부터는 매달 530만원상당을 소년소녀가장, 불우노인 등 130여명에게 꼬박꼬박 전달했다. 조씨는 세상을 떠난 아들 이름으로 곧 장학회를 설립할 생각이다.


“다 털어놓고 나니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한동안 창문 밖을 응시했다.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천〓박정규기자>jangk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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