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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 공유

[나는 이렇게산다]소아암 아이들에 웃음주는‘빡빡

작성자
제**
작성일
2002-05-07
댓글
0
조회수
1782
-개그맨 지망생 조용준씨-


개그맨 지망생 조용준씨(30)는 자칭 ‘깜찍이’다. 하지만 신촌 세브란스 소아암병동 아이들은 매번 그를 ‘빡빡이’라고 부른다. 방사선 치료 때문에 한결같이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깎은 아이들은 조씨를 보자마자 일제히 ‘빡빡이, 빡빡이’하면서 저희들끼리 키득거린다. ‘오늘은 어떤 놀이를 가져왔을까?’. 색색이 꼬깔모자를 쓴 아이들의 눈동자는 기대에 부풀어 초롱초롱 빛난다.조씨가 한달에 한번씩 아이들 생일잔치를 위한 개그공연을 하는 날이면 오랜 투병으로 말수를 잃은 아이들도 하나 둘씩 생기를 되찾고 천진난만하게 깔깔댄다. 그럴 때면 조씨는 더욱 신이 난다.


조씨는 “이곳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 그동안 개발한 게임과 마술, 퀴즈만도 수백가지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너희들에게 투시력을 주겠다’고 하면서 종이에 ‘모르겠습니다’라고 써놓고 그것을 접은 다음 ‘이 종이 안에 뭐라고 써있게’ 라고 묻는 놀이다. 아이들이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면 그 종이를 펼쳐 보이면서 ‘자 봐라, 내가 너희들한테 투시력을 줬지?』라고 해 아이들을 한바탕 웃게 하는 것이다.


조씨와 이곳 아이들의 인연은 그의 유별난 헤어스타일에서 비롯됐다. 3년 전 대학축제에서 사회를 보던 조씨에게 한 병원 직원이 다가와 “그런 헤어스타일이면 아이들이 동질감을 느껴 좋아하겠다”고 던진 한마디가 계기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30분 안에 웃길 수 있다고 자부하는 조씨도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한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보연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웃고 난리더라고요. 그렇게 한번 웃고 나니까 금세 친해졌지요”


조씨는 처음에는 그저 한두번 하고말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며 웃고 좋아하는 아이들 얼굴이 눈에 밟혀 번번이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이 올해로 3년째다. “이렇게 아픈데도 꿋꿋이 견뎌내는 아이가 너무 대견하다”며 ‘슬픈 자랑’을 들려주는 초췌한 부모들의 모습도 언제나 조씨의 마음을 흔들었다. 집을 팔고 전세에서 월세로 옮겨가면서도 아이가 완치된다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 부모들을 조씨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달 만의 만남’에 늘 기쁨과 보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만났을 때 쾌활하게 어울려 놀던 아이가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면 덜컥 겁이 난다. 조씨는 “한 달 사이에 세상을 버린 아이들 소식을 듣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서 하루종일 펑펑 운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맺혀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조씨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명동성당 앞에서 노래하던 무명가수의 모습을 떠올린다. “심장병 어린이 치료비 모금을 위해 거리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내가 가진 재능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한때 한의사가 되기를 꿈꿨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아들에게 투영시킨 목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차례의 대학낙방을 거친 뒤 조씨는 결국 아버지의 희망과 자신의 꿈이 행복하게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 방황의 날이 이어졌다. 조씨가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재능에 눈뜬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늦은 나이에 서일전문대 레크리에이션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다. 어떤 모임에서도 원맨쇼로 3시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끼와 사람을 웃기는 일에 행복해하는 자신을 더이상 속일 수 없었다. 개그맨이 되고 싶었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은 한차례의 폭력사태로 해결됐다.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의 첫반응이 주먹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하시는 분위기죠”


이제 조씨는 사람을 웃기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능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생활신조도 ‘하루에 한번 이상 웃긴다’로 정했다. 매달 한번씩 소아암병동 아이들을 만나는 일도 자신의 재능으로 남을 돕겠다는 예전의 막연한 다짐을 실천하는 일이다. 또 지난달부터는 개그동아리 동료들과 함께 대학로에서 소아암병동 아이와 가족들을 위한 무료 개그공연도 시작했다.


조씨는 병마와 싸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오히려 새롭게 배운다고 했다. “뇌종양을 앓는 현준이(13)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술을 14번이나 받은 불편한 몸이지만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자기보다 불편한 친구들을 도와줍니다. ‘현준이가 살아있어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현준군 어머니도 언제나 저에겐 감동적입니다”


대학축제나 기업 행사에서 개그공연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는 조씨는 앞으로도 남을 웃기는 일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남을 웃기는 재능이 하늘에서 준 것이라면 반드시 사회적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웃음의 본질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웃기는 일이 제게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번쩍거리는 머리만큼 그의 미소도 환하게 빛났다.


〈신현기기자 n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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